2009년 5월 20일 수요일
개발력이 웹서비스에게 중요한 이유
단순하게 이런 빠른 재수정이 갖는 의미를 수식화 해보자. 어떤 서비스 수정의 성공확률이 10%라고 할 때, 1회 시행시의 실패 확률은 90%이다. 그런데 이런 수정을 10번 반복한다면? 전부 실패할 확률은 0.9^10 이므로 34%, 다시 말해 66% 확률로 10번의 시도중 하나는 성공한다는 얘기다. 반복 시도를 통해 배운 교훈과 힌트를 통해 확률이 점점 높아질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더욱 높은 확률로 한번의 성공은 필연에 가까워 진다.
이런 논리는, 벤처기업의 3년차 위기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3년을 버티지 못하는 벤처가 대다수지만, 3년을 넘기는 시점에서 생존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3년이란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 보단, 상당한 시행착오를 반복할 동안 버틸 수 있는 벤처는 기어이 성공한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렇다면 통상적인 웹서비스가 3년동안을 버틴다? 쉽지 않은 문제다. 혁신적인 수익모델은 눈에 띄지 않고, 투자 또한 경색되어 있다. 결국 빠른 개발만이, 보다 많은 시도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요소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발이란, 단순히 비슷한 요소를 추가하거나, 보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공하지 못했던 기존 서비스의 틀을 깨는 신선하고 유의미한 혁신을 빠르게 반복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개발력이다.
2007년 10월 10일 수요일
내가 배운 것과 다른 걸 원하는 세상
"물론 너는 네 또래보다 많은 것을 알고, 더 잘 표현할 줄 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인정하기 보단 오히려 깎아 내릴 것이다. 사람들은 시끄러운 수레는 비었다고 생각하고, 벼는 마땅이 익으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네가 맞춰가야 한다."
나는 그 분들의 진정어린 충고에 "저는 너무 익어서 고개를 숙이다 못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꼳꼳해진 상태이며, 수레가 꽉 차다 못해 넘치다 보니 시끄러운 것이에요."라고 농으로 응수하는 영악함과 경박함을 견지했다. 그러나 주변인들과의 반복되는 만남에서, 계속되는 클레임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선의의 포교자만큼 골치아픈 것도 없는 법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어릴 적의 화려한 선방(?)을 생각해 볼 때, 놀랍다면 놀랍고 우습다면 우습게도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그 종교에 귀의한 상태이다. 나는 가벼움을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가볍지 않고자 하게 되었다. 레크레이션이라도 하면 나가 춤을 추고 대단히 잘춘다란 칭찬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던(못 추면 물론 안 나감) 아이는, 사진 찍히는 것 조차 꺼림직해 하는 성인이 되었다. MBTI검사에서 높은 자기 주관성(T)을 기록하는 나 조차 이렇게 변한 걸 보면, 교육 환경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됐건 나는 제법 점잖은 인물이 되었다. 따라서 더이상 어른들도 클레임을 걸지 않는다. 나서야 할 때 나서고 있지만, 계면쩍어 하는 겸손을 첨부하게 되었다. 물론 빠질 때는 빠지고 있고. 이렇게, 나는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물상이 되었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요즈음 벤처를 하면서, 새삼스럽게 나는 '대학생스럽고', '귀여울 것'을 요구 받고 있다. 이런 조언을 던지는 이들에겐 여러 복합적인 의도가 있겠지만, 어찌됐건 그들은 내가 '어린 티를 내줄 것'을 기대하는 눈치다. 전후좌우를 따져보면, (물론 젊음에 대한 다소 편협한 이해가 없진 않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의 주문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진리와 다른 것일까. 그 동안의 내가 봐왔던 어른들은 갑자기 이 세계에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진입하는 웹 비즈니스, 혹은 벤처의 세계가 유별난 것일까.
어차피 내가 봐 온 세계도 이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이며, 앞으로 볼 세계도 일부일 뿐이기에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현상이다. 하지만, 몸은 멍청하다. 물론 나는 필요하면 뭐든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설계했고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가끔 엉뚱한 세계에 던져졌다는 부유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아노미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듯 하다.
2007년 9월 9일 일요일
벤처 창업이란..
우리가 입주해 있는 이 건물의 2층에는 약 150~200M 가량 직선으로 이어진 복도가 있다. 때 늦은 장마 이후, 실로 오랜만에 흐드러지게 핀 햇빛이 주말의 어두운 복도 깊숙히 스멀스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일요일의 스산함과는 제법 부조리한 모양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눈을 감고 이 길을 걸으려 했다. 눈을 감은 채 길을 걸으려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물론 대개는 발 걸음을 몇 번도 채 띄지 않아 눈을 뜨고 만다. 이것은 시각이 발달한 생명체로서의 본능이다. 그러나 드물지만, 왠지 모를 오기가 나 계속 눈을 감고 걸으려는 때가 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런 경우였다. 장애물도 거의 없이 뻥 뚤린 직선의 길이다. 따스한 햇빛이 인도하는 그 길을 걷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눈을 떠야만 한단 말인가.
하지만 눈을 감고 걷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걸음의 속도가 몰라보게 느려진다. 속도를 내는 만큼 충격도 크기 때문이다. 느릿하게 걸어가면서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드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온 안도감도 금새 휘발되어 버린다. 방향감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에, 그냥 쭉 걸어가면 끝일 복도를 걷는데 무슨 방향감각.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 내가 그리는 상상의 좌표는 어둠 속에서 흔들거린다. 반면 엉뚱한 것들이 내 머리속을 휘젓기 시작한다. 방금 전 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활성화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청각이었다. 기계가 뿜는 숨소리, 건물 밖 벌레들의 사각거림 따위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만은 그럼에도 들린다. 흔들리는 어둠 속에서 기계와 벌레등이 뛰어다닌다.
이 쯤되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된다. 내 바로 앞에 벽이 있을지, 아니면 어이 없는 표정의 경비원이 있을지를 말이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휘젓게 된다. 그렇게 손이 어둠으로 가려진 허공을 베면 공포도 조금은 베인다. 그래서 나는 걸을 수 있다. 방향은 이미 잃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래서 눈을 뜨고 싶은 욕망이 마구 피어 오른다. 나의 목표를 다시 확인하자, 그러면 난 다시 힘차게 걸을 수 있을거야- 라고. 그것은 지극히 논리적이고, 타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았다. 눈을 뜬다는 건, 게임의 룰을 어기는 것이다. 그것은 게임에서 진다는 의미와 다름 없다. 물론 눈을 뜨고 걷는 것이 안전하다. 거기까진 좋다. 그런데, 그래서 난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주어진 삶에 만족하기 위해 일부러 스크루지와 같은 체험을 할 필요는 단연코 없다.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눈을 감았고, 무언가를 얻지 않는 이상 만족 할 수 없다. 자기합리화를 하느니 애초에 눈을 감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창업이, 이 어리석은 놀이와 지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창업자는 어쩌면 너무나도 손 쉬워 보이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걸어(뛰어)간다. 그러나 불과 몇 걸음도 안가 목표는 암흑 속으로 숨어버리고 별 시덥잖은 것들이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무엇이 시덥잖은 사실이란 건지 알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공포는 그 시덥잖은 사실과 중요한 사실을 섞고 창업자를 흔든다. 똑바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두말할 필요도 없는 해결 방법이다. 그러나 그걸 할 수가 없다. 손을 휘젖다 보면 몸도 휘청, 마음도 휘청 이다. 제법 왔다는 것을 채 느끼기도 전에 눈을 뜨고 싶다는 욕망이 머리 속을 지배한다. 하지만 눈을 뜨면 진다. 그게 게임의 규칙이니까. 창업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충분한 준비물을 갖추고 눈을 감아야 할까? 혹은 눈을 감고 걷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할까? 소리와 빛을 파악해 방향을 유지하는 기술을 익혀야 할까? 글쎄, 어떤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어떻게 준비하 건 특정 시점에선 두렵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나는 그런 심정으로 오늘도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