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0일 수요일

내가 배운 것과 다른 걸 원하는 세상

어릴 때 나의 성품은 그리 돈후하지 못했고, 오히려 경박함에 가까웠다. 매우 강한 지식 습득에 대한 욕구가 있었고 실제로 그것을 흡수할 환경과 능력도 있었으므로 또래보다 많은 것을 알았지만, 강한 표현의 욕구를 절제하지 못해 아직 어린이의 잘난척일 뿐인 논평들을 늘어 놓곤 했으니 말이다. 어른들의 책을 읽으며(초등학교 6학년 때 아담 스미스나 프로이트 따위를 읽었다), 어른들의 대화에 끼길 좋아하는, 그렇게 어른인 척 하는 아이에게, 주변의 어른들은 대게 그런 표현을 자제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너는 네 또래보다 많은 것을 알고, 더 잘 표현할 줄 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인정하기 보단 오히려 깎아 내릴 것이다. 사람들은 시끄러운 수레는 비었다고 생각하고, 벼는 마땅이 익으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네가 맞춰가야 한다."

나는 그 분들의 진정어린 충고에 "저는 너무 익어서 고개를 숙이다 못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꼳꼳해진 상태이며, 수레가 꽉 차다 못해 넘치다 보니 시끄러운 것이에요."라고 농으로 응수하는 영악함과 경박함을 견지했다. 그러나 주변인들과의 반복되는 만남에서, 계속되는 클레임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선의의 포교자만큼 골치아픈 것도 없는 법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어릴 적의 화려한 선방(?)을 생각해 볼 때, 놀랍다면 놀랍고 우습다면 우습게도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그 종교에 귀의한 상태이다. 나는 가벼움을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가볍지 않고자 하게 되었다. 레크레이션이라도 하면 나가 춤을 추고 대단히 잘춘다란 칭찬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던(못 추면 물론 안 나감) 아이는, 사진 찍히는 것 조차 꺼림직해 하는 성인이 되었다. MBTI검사에서 높은 자기 주관성(T)을 기록하는 나 조차 이렇게 변한 걸 보면, 교육 환경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됐건 나는 제법 점잖은 인물이 되었다. 따라서 더이상 어른들도 클레임을 걸지 않는다. 나서야 할 때 나서고 있지만, 계면쩍어 하는 겸손을 첨부하게 되었다. 물론 빠질 때는 빠지고 있고. 이렇게, 나는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물상이 되었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요즈음 벤처를 하면서, 새삼스럽게 나는 '대학생스럽고', '귀여울 것'을 요구 받고 있다. 이런 조언을 던지는 이들에겐 여러 복합적인 의도가 있겠지만, 어찌됐건 그들은 내가 '어린 티를 내줄 것'을 기대하는 눈치다. 전후좌우를 따져보면, (물론 젊음에 대한 다소 편협한 이해가 없진 않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의 주문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진리와 다른 것일까. 그 동안의 내가 봐왔던 어른들은 갑자기 이 세계에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진입하는 웹 비즈니스, 혹은 벤처의 세계가 유별난 것일까.

어차피 내가 봐 온 세계도 이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이며, 앞으로 볼 세계도 일부일 뿐이기에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현상이다. 하지만, 몸은 멍청하다. 물론 나는 필요하면 뭐든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설계했고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가끔 엉뚱한 세계에 던져졌다는 부유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아노미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듯 하다.


댓글 4개:

  1. 어제는 '그런데 요즘 벤쳐를 하면서' 부터의 부분을 읽지 않고 전반부만 보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



    인터넷 벤쳐를 하게 되면 주변에서 대학생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어느 정도 정해진 코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젊은 패기만 가지고 별 생각없이 우루루 몰려와 도전하는 이상한 벤쳐(-_-)들이 많기 때문이죠. '무개념 전대(일본 특촬물의 전대)'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컨텐츠 사업을 하신다고 했으니 컨텐츠의 퀄리티면에서 뭔가 확 다른 차별성이 드러난다면 주변의 시각도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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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최준열 - 2007/10/12 09:33
    어릴 때는 어른스러워야 한다고 말하던 어른들이, 지금은 젊고 어려보이라 요구하는 모습이 어색하단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결국은 실력으로 판가름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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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책들을..ㄷㄷ 대단하십니다.

    좋은 밤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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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Zet - 2007/10/14 23:27
    사실 당시엔(사실 지금도?) 잘 이해하진 못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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