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7일 목요일

강자는 쇼를 하지 않는다.




최근래 사이에 KTF의 '쇼' 프로모션은 어떠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것은 먹히고 있다. 아이들은 쇼 곱하기 쇼를 외치며 논다. 그게 뭘 뜻하는 지는 모르고 말이다.

쇼는 약자가 한다. 광고 안에서도 그런 구도는 명확하다. 비행기/영화 티켓을 가지지 못했거나, 휴가를 받아야 하는 직장인이거나, 아들에게 용돈을 타야 하는 부모처럼- 말이다. 광고는 그러한 궁상맞음, 혹은 불행을 어처구니 없게도 긍정하라고 강요한다. 남에게 '쇼를 한다'고 타박을 들어도 좋으니 쇼를 하란다. 왜냐면 쇼는 나쁜게 아니니까! 자기연민을 날려버리는 자기 학대가 가져다 주는 쾌감은 어떤 면에선 분명하다. 따라서 쇼의 광고는 계속 멍청한 짓거리들로 채워질 것이 틀림없다(쇼의 광고에 동영상 UCC의 냄새가 아주 짙게 나는 이유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쇼를 벌이는 자가 똑똑하고 현명한 강자라는 것을 시청자들이 깨닫는 순간 시청자들을 만족케 했던 해방감이 사라질 것이므로.

하지만 사실 똑독하고 현명한 강자(연예인을 제외하면)는 애초에 쇼를 하지 않는다. 광고 속의 극장주나, 상사등은 쇼를 할 필요가 없고 실제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쇼에 대한 진실이다. 결국 쇼는 절대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행복론이 아니다. 땡깡, 아니면 자기 학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광고로 말미암아 쇼를 한다란 말이 다른 의미로 쓰이기 시작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바뀐 어휘라 한들 내 자식이 '쇼 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동영상 UCC의 한계란 글에서 말했다 시피, 거기엔 어떤 철학과 영혼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누군가는) 알아준다는 웹2.0 사이트를 창업한 동영상 속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든 떠 보고 싶어 캠 앞에 선 10대 연예인 지망생 아이들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면 내가 오버하는 걸까? 순박하기까지 한 그들을 욕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만큼 이 바닥이 쉽지 않다는 걸게다. 고상함도 시장에서 거래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그들의 쇼를 탓할 수 있으랴. 다만 약자임을 떳떳해 하는 모습이 난 썩 달갑지 않다.


2007년 9월 18일 화요일

20대 공감 놀이터, 펀키아?

https://www.funkia.kr/

이 사이트의 테마 : 과유불급
이해 할 수 없는 건 이 사이트를 만든 회사가 기아란 사실이다. 젊은 애들 데려다 최근 뜬다는 기능만 죽 모아놓은 모양새가 쾌쾌한 차 샤시에 봄내음 좀 풍겨 보려는 것 같은데, 내게 느껴지는 건 돈 냄새 뿐이다. 허재와 이종범이 다져놓은 내 기아 사랑이 흔들리는 구나..


2007년 9월 16일 일요일

웹서비스에 있어, 디자인은 주인공이 될 수 없는가?

"그 제품이 성공한 건 디자인 때문이야."라는 말은 가끔 듣는다. B&O같은 기업의 제품이 팔리는 걸 보고 있으면 정말 그런 것도 같다. 그런데 "그 웹 사이트가 성공한 건 디자인 때문이야" 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실제로 가장 성공적인 인터넷 기업인 야후나 구글을 보고 있노라면, 웹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이란 마치 오래된 미신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정녕 인터넷 유저들은 디자인이 끝내준다면 다른 요소를 포기할 용의가 없는 걸까?

생각은 있으되, 아직 정리가 잘 안된다.


2007년 9월 11일 화요일

소년이여 납세자가 되라.

전화가 한 통 왔다. 국민연금 내란 소리. 버는게 한푼이라도 있어야 내지 않겠느냐고 반문했지만, 창업을 해서 이익추구 활동을 하는 것이니 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월 7만원을 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다. 별 거 아닌 돈이라면 별 거 아닌 돈이지만, 돈 없는 휴학생에겐 가볍지 않은 액수이다. 이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고, 이렇게 친정부 성향의 투표권자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회의주의로 바꾸는는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물론 국민연금은 세금은 아니다. 다만 돈 뜯기는 기분을 느끼자 정부에 대한 호감이 -10포인트 되는 현상을 시사하고 싶었음.


2007년 9월 9일 일요일

벤처 창업이란..

우리가 입주해 있는 이 건물의 2층에는 약 150~200M 가량 직선으로 이어진 복도가 있다. 때 늦은 장마 이후, 실로 오랜만에 흐드러지게 핀 햇빛이 주말의 어두운 복도 깊숙히 스멀스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일요일의 스산함과는 제법 부조리한 모양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눈을 감고 이 길을 걸으려 했다. 눈을 감은 채 길을 걸으려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물론 대개는 발 걸음을 몇 번도 채 띄지 않아 눈을 뜨고 만다. 이것은 시각이 발달한 생명체로서의 본능이다. 그러나 드물지만, 왠지 모를 오기가 나 계속 눈을 감고 걸으려는 때가 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런 경우였다. 장애물도 거의 없이 뻥 뚤린 직선의 길이다. 따스한 햇빛이 인도하는 그 길을 걷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눈을 떠야만 한단 말인가.

하지만 눈을 감고 걷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걸음의 속도가 몰라보게 느려진다. 속도를 내는 만큼 충격도 크기 때문이다. 느릿하게 걸어가면서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드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온 안도감도 금새 휘발되어 버린다. 방향감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에, 그냥 쭉 걸어가면 끝일 복도를 걷는데 무슨 방향감각.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 내가 그리는 상상의 좌표는 어둠 속에서 흔들거린다. 반면 엉뚱한 것들이 내 머리속을 휘젓기 시작한다. 방금 전 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활성화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청각이었다. 기계가 뿜는 숨소리, 건물 밖 벌레들의 사각거림 따위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만은 그럼에도 들린다. 흔들리는 어둠 속에서 기계와 벌레등이 뛰어다닌다.

이 쯤되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된다. 내 바로 앞에 벽이 있을지, 아니면 어이 없는 표정의 경비원이 있을지를 말이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휘젓게 된다. 그렇게 손이 어둠으로 가려진 허공을 베면 공포도 조금은 베인다. 그래서 나는 걸을 수 있다. 방향은 이미 잃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래서 눈을 뜨고 싶은 욕망이 마구 피어 오른다. 나의 목표를 다시 확인하자, 그러면 난 다시 힘차게 걸을 수 있을거야- 라고. 그것은 지극히 논리적이고, 타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았다. 눈을 뜬다는 건, 게임의 룰을 어기는 것이다. 그것은 게임에서 진다는 의미와 다름 없다. 물론 눈을 뜨고 걷는 것이 안전하다. 거기까진 좋다. 그런데, 그래서 난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주어진 삶에 만족하기 위해 일부러 스크루지와 같은 체험을 할 필요는 단연코 없다.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눈을 감았고, 무언가를 얻지 않는 이상 만족 할 수 없다. 자기합리화를 하느니 애초에 눈을 감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창업이, 이 어리석은 놀이와 지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창업자는 어쩌면 너무나도 손 쉬워 보이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걸어(뛰어)간다. 그러나 불과 몇 걸음도 안가 목표는 암흑 속으로 숨어버리고 별 시덥잖은 것들이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무엇이 시덥잖은 사실이란 건지 알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공포는 그 시덥잖은 사실과 중요한 사실을 섞고 창업자를 흔든다. 똑바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두말할 필요도 없는 해결 방법이다. 그러나 그걸 할 수가 없다. 손을 휘젖다 보면 몸도 휘청, 마음도 휘청 이다. 제법 왔다는 것을 채 느끼기도 전에 눈을 뜨고 싶다는 욕망이 머리 속을 지배한다. 하지만 눈을 뜨면 진다. 그게 게임의 규칙이니까. 창업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충분한 준비물을 갖추고 눈을 감아야 할까? 혹은 눈을 감고 걷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할까? 소리와 빛을 파악해 방향을 유지하는 기술을 익혀야 할까? 글쎄, 어떤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어떻게 준비하 건 특정 시점에선 두렵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나는 그런 심정으로 오늘도 걸어가고 있다.


2007년 9월 8일 토요일

가늠할 수 없는 꿈의 크기.

드라마 대조영의 캐치 프라이즈. 드라마 자체는 개인적으로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저 문구는 예외다.

욕망을 긍정해야 한다. 자신의 밑바닥에서 꿈틀 대는 무언가를 언어화 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 자신과의 악수이다. 악수가 거듭될 수록 그의 발언권이 세지는 걸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굴욕적인 관계라고 생각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것은 당신이니까.


2007년 9월 2일 일요일

벤처는 '우리가 훨씬 낫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구글이 나타나기 이전 '검색'은 흥미로운 하나의 요소일 뿐이었다. 영업부터 오만가지 수요에 귀를 기울여야 했던 기존 강자들은, 이 괴짜스런 기술에 눈을 두지 않았다. 이는 덩치 큰 조직이 맞이하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지만 대개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소비자들의 입장에선 괴짜스러운 (다수의 단점을 포함한) 특정한 장점보다는 익숙하고 전반적으로 원만하고 익숙한 기존 기술을 택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치 마켓의 요구가 순식간에 메이저 트랜드로 치고 올라올 수 있다는 점에서, 웹은 기존의 어떤 경제 생태계보다 흥미롭다. 순식간에 패권이 뒤집혀 온 웹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지금도 음지에서 한정된 영역에 대해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꿈꿔 온 벤처들을 위한 찬송가처럼 들린다.

그러나 많은 벤처들이 이따금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웹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를 트랜드로 승천시킬 수 있는 여의주와도 같지만, 그 여의주를 부라퀴로부터 빼앗어 움켜쥘 수 있는 능력은 결국 힘이라는 것이다. 구글이, 네이버가, 그리고 수 많은 웹 서비스가 성공한 것은 그들의 아이디어가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자, 전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왜 성공했느냐고? 답은 단순하다. 그 서비스가 더 뛰어났다는 것. 구글의 검색은 생색내기 수준에 불과하던 야후보다 훨씬 뛰어났다. 네이버의 지식IN은 상세한 정보의 제공에 있어 다른 무엇보다 훨씬 뛰어났다. 트렌드를 잘 읽고 예측하는 일도 물론 중요한 문제지만, 어찌됐건 그 분야에 있어선 분명히 뛰어났다, 그러니까 성공했다- 이것이야 말로 본질인 것이다.

한국은 왜 웹 2.0 서비스가 별 볼일 없는지에 대한 포스팅을 보았다. 다양한 이유가 사용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본질적 이유를 정리 하면 결국 하나의 사실로 수렴한다. 한국의 웹 2.0 서비스업자란 자들이 기존의 강자들보다 우수한 서비스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 말이다. 올블로그는 다음 블로거 기자단보다 우수한가? 태터툴즈는 네이버 블로그보다 우수한가? 위자드닷컴은 포탈보다 우수한가? 특정한 비교우위가 있다는 건 알겠지만, 결국 포괄적으론 '글쎄'라는 대답이 나온다. 토끼가 사자보다 빠르다 해서 사자를 잡아먹을 수는 없는 것처럼, 결정적인 능력의 차이는 사소한 장점을 압도한다. 생존(일정량의 쉐어를 차지)하는 것 까지는 해낼지 모른다. 그러나 한정된 좁은 울타리(한국 웹) 안 에서 뛰어 봤자다. 지배적인 강자가 되려면, 속도 만으론 부족하다. 신선함도 파격성도 힘에 의해 가치를 얻는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토끼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재즈잭래빗이 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웹 2.0 토끼 중엔 그렇게 힘있는 서비스가 눈에 띄질 않는다.

나는 이런 무기력함의 기저에, 펀딩 환경의 미비가 아주 강력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할 지언데, 제대로 돈을 못 투자 받으니 그저 그런 인재로 해 나갈 도리밖에 없다. 반면 우수한 인재를 그대로 손에 쥔 포탈. 스스로 자멸하지 않는 이상, 포탈이 승리하는 건 굳이 한국 유저의 취향이니 포탈 권력따위를 언급하지 않아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의 능력을 놓고 "우리가 구글보다 인물 검색에선 훨씬 낫다" 라고 말하는 정도의 포스가 없다면, 그 벤처의 미래는 험난할 것이다. 설령 지금 잘 나가고 있다 해도 말이다.  

비즈니스적인 의미가 필요하지 않다면, 단지 좋은 서비스를 만들기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개척하고, 이어지는 경쟁에서 끝내 이기고 올라올 힘 있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정말로 어려워 보인다. 이 세상에 무언가 기여 한다라는 관점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는 시도만으로도 높게 평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으려는 승자들의 논리는 분명한 힘이다. 나는 판도라TV도 싸이월드도 메가스터디도 다 박살내 버리고 싶다. 암수와 음모가 아닌 순수한 능력의 차이로 말이다. 그것은 실로 어려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결국 분명히 성공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