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9일 일요일

벤처 창업이란..

우리가 입주해 있는 이 건물의 2층에는 약 150~200M 가량 직선으로 이어진 복도가 있다. 때 늦은 장마 이후, 실로 오랜만에 흐드러지게 핀 햇빛이 주말의 어두운 복도 깊숙히 스멀스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일요일의 스산함과는 제법 부조리한 모양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눈을 감고 이 길을 걸으려 했다. 눈을 감은 채 길을 걸으려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물론 대개는 발 걸음을 몇 번도 채 띄지 않아 눈을 뜨고 만다. 이것은 시각이 발달한 생명체로서의 본능이다. 그러나 드물지만, 왠지 모를 오기가 나 계속 눈을 감고 걸으려는 때가 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런 경우였다. 장애물도 거의 없이 뻥 뚤린 직선의 길이다. 따스한 햇빛이 인도하는 그 길을 걷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눈을 떠야만 한단 말인가.

하지만 눈을 감고 걷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걸음의 속도가 몰라보게 느려진다. 속도를 내는 만큼 충격도 크기 때문이다. 느릿하게 걸어가면서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드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온 안도감도 금새 휘발되어 버린다. 방향감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에, 그냥 쭉 걸어가면 끝일 복도를 걷는데 무슨 방향감각.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 내가 그리는 상상의 좌표는 어둠 속에서 흔들거린다. 반면 엉뚱한 것들이 내 머리속을 휘젓기 시작한다. 방금 전 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활성화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청각이었다. 기계가 뿜는 숨소리, 건물 밖 벌레들의 사각거림 따위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만은 그럼에도 들린다. 흔들리는 어둠 속에서 기계와 벌레등이 뛰어다닌다.

이 쯤되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된다. 내 바로 앞에 벽이 있을지, 아니면 어이 없는 표정의 경비원이 있을지를 말이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휘젓게 된다. 그렇게 손이 어둠으로 가려진 허공을 베면 공포도 조금은 베인다. 그래서 나는 걸을 수 있다. 방향은 이미 잃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래서 눈을 뜨고 싶은 욕망이 마구 피어 오른다. 나의 목표를 다시 확인하자, 그러면 난 다시 힘차게 걸을 수 있을거야- 라고. 그것은 지극히 논리적이고, 타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았다. 눈을 뜬다는 건, 게임의 룰을 어기는 것이다. 그것은 게임에서 진다는 의미와 다름 없다. 물론 눈을 뜨고 걷는 것이 안전하다. 거기까진 좋다. 그런데, 그래서 난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주어진 삶에 만족하기 위해 일부러 스크루지와 같은 체험을 할 필요는 단연코 없다.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눈을 감았고, 무언가를 얻지 않는 이상 만족 할 수 없다. 자기합리화를 하느니 애초에 눈을 감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창업이, 이 어리석은 놀이와 지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창업자는 어쩌면 너무나도 손 쉬워 보이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걸어(뛰어)간다. 그러나 불과 몇 걸음도 안가 목표는 암흑 속으로 숨어버리고 별 시덥잖은 것들이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무엇이 시덥잖은 사실이란 건지 알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공포는 그 시덥잖은 사실과 중요한 사실을 섞고 창업자를 흔든다. 똑바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두말할 필요도 없는 해결 방법이다. 그러나 그걸 할 수가 없다. 손을 휘젖다 보면 몸도 휘청, 마음도 휘청 이다. 제법 왔다는 것을 채 느끼기도 전에 눈을 뜨고 싶다는 욕망이 머리 속을 지배한다. 하지만 눈을 뜨면 진다. 그게 게임의 규칙이니까. 창업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충분한 준비물을 갖추고 눈을 감아야 할까? 혹은 눈을 감고 걷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할까? 소리와 빛을 파악해 방향을 유지하는 기술을 익혀야 할까? 글쎄, 어떤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어떻게 준비하 건 특정 시점에선 두렵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나는 그런 심정으로 오늘도 걸어가고 있다.


댓글 6개:

  1. 소프트웨어도 그렇고 뭐든지 로직이 단순한 편이 좋지요. 저 같은 경우는 머릿속에 '실제로 대단한 위협이든 아니든 무조건 전진하라'는 로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



    나중에 눈을 뜨고 보니 실제로 대단한 위협이어도 별 관계 없는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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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최준열 - 2007/09/09 21:23
    두려움에 굴복하면 소시민이 되고, 두려움을 잊으면 도박꾼이 되고, 두려움을 지배하면 모험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최준열님의 모습은 모험가의 그것 같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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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특히 시작 직전엔, 확신과 의구심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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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비스켓 - 2007/09/12 13:57
    시작하고 보니 그 낙폭이 더 커지더군요, 허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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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모든 창업자의 마음일것입니다. 잡스형님의 사진이라도 책상앞에 붙여놓아보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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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까우 - 2007/09/16 19:31
    재밌는 말씀 감사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빌 형님을 더 좋아합니다. 사진을 어디서 구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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