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4일 목요일

구라를 잘 치는 한국소설이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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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건 문학에서 큰 의미가 없다.


1.
선정적인 제목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우린 어려서부터 '진실되게 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최소한 구라가 미덕인 직업도 있다. 적절한 거짓말은, 진실을 보다 풍성하게 한다. 선의의 거짓말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문학성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이다.

사실, 난 자기기만이 아닌 한은 거짓말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실이란 무한소의 협소한 특정 영역이고, 거짓은 그 여집합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물론이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우리가 합의한 애매함일 뿐 그것이 지시하는 진정한 본체는 아니다. 언어가 몸짓이나 그림, 기타의 것으로 바뀐다 해도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인류보완계획이라도 실시하지 않는 한, 거짓은 공기와 같은 것이다.

너무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로 빠진 것 같은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간단하다. 내가 말하는 거짓이란, 재산신고를 29만원으로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란 거다. 제목에서 언급한 구라는 용이하게 작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구라이다. 언어가 메신저라면, 구라는 폰트와도 같다.


2.
일본 애니메이션, 게임, 소설 등을 보고 있다 보면 감탄할 때가 있다. "참 잘도 가져다 붙였네"라고 말이다. 부정적 어투로 보이겠지만, 사실 이것은 칭찬이다. 만화왕국에서 자라서 인지는 몰라도, 그네들은 참 별별 종류의 소재들을 내용에 '가져다 붙인'다. 그것은 과학이기도 하고, 미학이기도 하며, 철학이기도 하다. 벌레 같은 존재가 된 주인공을 통해 불황 이전의 일본 남성 라이프스타일이 시체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표현하려 했다는 등의 말(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무라카미 류)을 보고 있으면 독자로선 재미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적인 유희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여러 모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흥미란게 중요하다. 경영학도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대로 된 시장이 형성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질의 재화가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새로운 시장을 형성시킴에 있어 중요한 게 무엇일까? 마케팅 아닌가. 상품에 흥미거리가 많다는 건, 마케팅 당담자에겐 천군만마와도 같은 일이다.

한국 문학이 죽었다는 말이 들린 건 제법 오래된 일이다. 물론 이 문제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볼 땐 소득 수준에 비할 때, 한국인들이 지나칠 정도로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히 정치인이 국민을 탓할 수 없듯이, 어찌 생산자가 소비자를 탓할 수 있으랴. 어찌됐건 '팔리는 소설'을 발굴해야 할 책임은 생산자에게 있다.


3.
이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구라가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그것은 29만원이 아니라, 미노프스키 입자와 같은 것이다. 소재에 매몰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소설이 현실의 알레고리를 포기하는 순간 그것은 저열한 판타지 소설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소설이 소재의 다양성을 포기해야 할 근거가 되진 않는다. 어차피 소설은 허구이고, 그 허구가 바로 구라이다. 이왕 치는 구라, 좀 풍성하게도 치면 안될까? 스토리 텔링 제대로 하자는 거다.

한국 작가들은 구라는 자제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아니면 구라를 칠 상상력이 없거나. 혹 멀쩡한 인간이 벌레가 되는 등의 구라에는 독자들이 안 속아줄거라고 믿는 걸까? 글 재주는 빼어나지만 자극적 소재로 어찌저찌 장난이나 칠 줄 아는 저열한 작가일지도 모를 무라카미 류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렇다면 카프카도 저열한 작가인가? 카프카를 감히 무라카미 류와 같은 위치에 놓으려는 게 아니다. 소재는 핑계거리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사실 나는 '구라가 적고', '포장이 적은' 문학이 싫은 소비자는 아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이우혁도, 김진명도, 원태연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나 같은 올드 패션 소비자는 거의 없다. 그들은 핸드폰 문자에 "밥먹었니" 라거나 "만나자"라거나 "안녕" 이라고만 쓰면 삐지는 세대이다. 그들에게 문자를 보낼 땐, 다소 미식거리더라도 "ㅋ"나 "ㅎ"나 "+_+" 따위의 이모티콘을 붙여줘야 한다. 그것이 파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소통이고, 그래서 창조이다. 귀여니의 소설을 파괴라고 생각하지 말라. 팔리는 소설엔 다 이유가 있다. 스토리 텔링은 정말 중요한, 그러나 은근히 무시되는 기술이다. 나는 여지껏 스토리 텔링이 되지 않는데도 히트 한 소설을 본 적이 없다.

창천항로를 보면, 막강한 군세와 유능한 부하들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땅에 틀어 밖혀 세상을 관망만 하는 유표를 일컳어 제갈량이 "천하와 성교해보지도 않고 (학문이란 수단을 통해)혼자 자위하며 만족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한국 작가는 자의식이 너무 강하다는 뉴스 제목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스즈미야 하루히 같은 소설이 많이 나오길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김언수의 캐비닛 정도의 글은 앞으로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댓글 2개:

  1. 저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듯 하군요. 저도 오랫동안 한국 드라마를 봐 오면서...'한국시장의 소비자들이 고급 드라마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문학'에 대한 need가 적으니까 드라마 생산자들도 그런 트랜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지...소비할 사람은 '그다지 문학적이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있는데 만드는 쪽에서 오바할 필요가 없는거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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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최준열 - 2007/06/19 16:06
    맙소사.. 이 댓글이 달린 걸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늦은 댓글 죄송합니다;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소비자가 왕은 왕인 거죠. 꼭 좋은게 아니라서 문제입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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